6월8일 금요일..
오늘은 크로아티아 마스카스카르를 아침일찍 출발해서 보스니아국경을 지나 메주고리에 까지 간후 다시 모스타르까지 간다..
그리고 모스타르에서 일박을 할 예정이다..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 화페를 거의 받지 않는다고한다.
1Bam=약700원 .. 1Bam=약 0.5 유로... 2Bam=1유로
돈단위는 마르카이다. 마르카의 반을 나누면 유로가된다.
그런데 돈을 쓸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유로로 계산해서 사용하면 되니 굳이 은행에서 환전할 필요가 없다..
성모가 발현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메주고리에를 방문했다...한글이 눈에 띄이는걸 보니 한국사람들이 꽤 많이 오는 모양이다.
밥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출출해서 햄버거와 빵 음료수를 사먹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햄버거하고는 거리가 많이 멀다..ㅎㅎ
모스타르 하면 이 다리가 떠오른다..
모스타르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으며,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강(江) 연안에 위치한다. 주변 일대에서 포도 ·과일 ·잎담배가 재배되고, 담배 ·섬유 ·목재가공 ·비행기 공업도 활발하다. 또 부근에 있는 석탄 ·보크사이트 채굴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중세 건축물이 많으며, 로마 시대의 성(城), 1556년 건설된 다리, 터키령 시대의 이슬람교 사원 등이 유명하다. 1878∼1918년 오스트리아 지배 때에는 세르비아 애국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
이곳도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눈에띈다.
보스니아 내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 제2차세계대전이후 가장 치명적인 전쟁.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만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 최대 규모의학살이 자행된 전쟁이기도 하다.그러나, 너무나 빠르게 잊혀지고 있다.
3년 반 동안 지속되었던 보스니아내전은 대량의 난민사태와 인종청소,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과 나토군 의 군사적 개입, 비정부 민간 구호단체들의 개입, 그리고 집중적인 언론보도 등의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른 양상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보스니아 내전을 ‘새로운 전쟁’이라 부른다.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충격을 준 전쟁이다. 400만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살던 집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했고 40%의 집들이 방화나 폭격등으로 인해 초토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25∼30만명의 사람들이 내전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나 아직도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또한 전쟁의 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으며, 실제로 1995년 6월빌 클린턴 이 앨고어 부통령과 함께 CNN의 앵커인 래리 킹과 대담을 나눴을 당시 그는 “내전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명이 내전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에 의해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인종청소 차원에서 집단학살을 당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의 붕괴·분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 이 벌어진 곳은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도아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이었다.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스니아에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유고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91년 당시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데이턴 협정으로 확정된 양 세력 간의 경계다. 경계선 동쪽 세르비아계 영역에 다수 거주했던 보스니아계 민간인들이 주된 희생자가 되었으며, 이후 세르비아계의 영역 확장으로 원래 크로아티아-무슬림(보스니아)계 지역이었던 곳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이전의 분쟁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각각의 분쟁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슬로베니아,크로아니아는 그 지역을 구성하는 민족 분포가 각각 슬로베니아계(90%), 크로아티아계(89%)로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적었으며, 주거 지역도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어 지역 내 민족 분쟁보다는 사실상 전선 쟁탈전이었다. 이와는 달리,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계,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에도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찬성했으나 세르비아계는 반대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결국 1992년 2월 29일 연방 내 보스니아페르체고비나 공화국의 2/3를 차지하던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르비아계가 이에 반발하면서 사태가 겁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3월부터 4월까지 각 지역에서 세 민족 간 소규모 충돌이 일어난다.
마침내 운명의 4월 미국과 유럽 공동체(이후 유럽연합)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보스니아의 연방 이탈이 사실상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되자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 계 민병대가 수도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웃한 신 유고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 하에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이름으로 봉기를 일으키고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직접적인 전면 개입보다는 내부 사병조직과 현지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일단은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가 함께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양상을 띄었으나, 여기에 크로아티아가 같은 해 6월 작게는 크로아티아계 공화국 지역, 크게는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목표로 참전하면서 상황은 더욱 막장이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하위 전쟁인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 에서는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스니아계였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였다. 크로아티아계의 무슬림 인종청소가 함께 자행되었다는 증거다.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 독립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라뇨 투지만 역시 전범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내전 중기인 1994년의 인구 구성. 세르비아계 영역이 전범위로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유일한 예외로 형제국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지도 남쪽의 크로아티아계(파란색) 영역이 일부 확장되었다. 보스니아계가 많았던 지역을 크로아티아계가 차지한 경우도 있다. 크로아티아가 본국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기도 여력이 부족하여 세르비아를 제대로 막지 못한 탓에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졌고,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스르프스카 군이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이 전쟁은 세르비아가 이하에 서술될 반인륜적인 짓거리만 안 했어도 승리할 가능성이 무척 높았던 전쟁이었다.
결국 1955년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역사적인 데이튼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계승되어 독립국으로서 인정되었으나, 각각 영토를 절반씩 차지한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무슬림 연합의 두 세력이 한 연방 내에서 공존하는 식으로 합의되었다. 대통령직은 세 민족이 돌아가며 맡게 된다는 협정 내용은 결국 갈등의 근본 원인인 민족 분쟁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후 1966년 부터 사라예보에서 스르프스카 공화국군이 철수하였다. 이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에는 유엔 감시 이행군과 러시아군이 공동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별도로 추가된 것은세르비아 계의 요청으로, 협정상 보장에 따라서 러시아군이 세르비아계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것.
다행히 2018년 현재까지는 큰 탈이 없지만 언제 타오를지 모르는 불안한 불씨가 남겨진 셈으로, 주변국들의 EU 가입이 미뤄지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이 내전은 제 1차세계대전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지역의 민족 분쟁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 보스니아의 수도사라예보에서 벌어진 케러 전면적인 국제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 세르비아 뒤에 범슬라브주의의 대부를 자처하는 러시아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세계대전 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상황인데, 다행히 1990년대의 국제정세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약화가 명확하던 시기였고 결국 유일 최강국이었던 미국빌 클링턴 행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밀려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하게 되면서 더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반론도 많다. 유고 내전 당시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무리한 개입이 쉽지 않았으며, 개입했다면 전쟁은 빠르게 종결되었을 것이기에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밑에서 인종청소와 같은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다. 또한 러시아가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방 측은 유고 내전을 최소화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이를 관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내전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서방측이 안이하게 행동하면서 그 피해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가 벌어진 이면에는 무슬림 정권을 축출해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방관만 하고 있었던 서방 세력의 태도가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서방도 이 전쟁에 대해 큰소리 칠 입장은 결코 되지 못한다는 것.
이 참담한 전쟁에서 보스니아에서는 3만 명이 넘는 군인과 이에 비슷한 수치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으며, 세르비아도 2만 명의 군인(주로 세르비아계 의용병과 스르프스카군)과 4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5천 명의 군인과 2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실제 사망자는 앞 수치들의 도합인 9만여 명보다 1~2만 명 정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상자나 난민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았다. 무려 22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직전 인구는 435만 명이었는데, 현재는 402만 명으로 줄었으니 난민의 규모와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민간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쟁의 생존자가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피폐하게 버텼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나마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제노사이드가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애초에 인구도 얼마 없는 동네라는 점 덕분에 아프리카 지역처럼 백만 단위에 이르는 대규모 사망자가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또한 국제적인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2003년 8월에 낸 한 보고서에 따르면, 1만 7000명가량이 실종 상태라고 밝혔고 가족들은 그들이 죽임을 당한 뒤 어딘가에 암매장됐을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보스니아 곳곳에선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보스니아 당국이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1995년 내전이 끝난 뒤 지난 8년 동안 약 1만 8000구의 시신이 발굴됐다.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약 1만1500명이며 나머지 6500명의 유골은 훼손이 심한 탓에 신원조차 확인이 안 된 상태다.
상흔의 상처는 쉽게 잊혀 지지 않을지 몰라도 먹고 사는 현실을 위해 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관심을 갖고 물건을 보고 있으면 주인들이 나와 물건을 설명하고 팔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다리위에서 돈을 걷고 나면 다리 젊은 사람이 뛰어내린다..
그외에도 용기 있는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점프를 하고는 한다..
공동묘지로 올라가는 길이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산소로 향했다.
숙소를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얻었는데 아직까지 해외여행중 최악의 호스트와 최악의 숙소를 만났다..
숙소 주소를 잘못 기재해 놓았는지 몰라도 아무리 구글 과 맵스미를 총동원해도 집을 찾을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 영어를 꽤 잘하는 보스니아 젊은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이사람도 여길 구글로 찾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전번을 주고 전화를 하게 해서야 비로써 집을 찾아냈다.. 그런데 집에 가보니 집전체가 수리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일층 방을 하나 내주었는데 완전히 내가 신청한 그집과 일백퍼센트 다르다..
항의를 하고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나가봤자 어디서 잠을 잘것인가? 그래서 하는수 없이 그냥 하룻밤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밤새 천장에서 물이 떨어 지는거다..ㅠ.,ㅠ..
물이 고여서 바닥을 타고 흐르니 수건을 총동원해서 물의 흐름을 막았다.ㅎㅎ..
암튼지 아침이 되서 호스트에게 항의하니 호스트는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이 그냥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간다..
덴장할..이런X가 우찌 슈퍼호스트가 된겨??
'보스니아·크로아티아드브로브니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브로브니크 2 (0) | 2018.06.22 |
---|---|
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니크 (0) | 2018.06.22 |